[설교] 개념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기도하는 사람

(요일 2:18-19) 개념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7월 4일 삼일교회 주일설교


(서론)
요한1서의 전체적인 주제는 하나님과의 교제, 사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무엇이 중요한가, 방해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다. 방해가 되는 내적인 요소는 이미 살펴보았고, 오늘은 외적인 요소에 해당되는 적그리스도(즉,마귀)의 방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적그리스도는 Anti-Crist라는 말이며, 성서에서 요한만 사용하는 단어이다. Anti라는 뜻은 대신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가장하는 가면을 쓴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즉,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마귀의 사역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요한 1서 1장,2장을 살펴보면 3개의 대조법구분이 있다. 빛과 어둠, 사랑과 미움, 진리와 거짓에 대한 대조구분이다. 요한은 성령의 빛과 참된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며, 거짓이 아닌 진리를 강조하였다. 진리없는 사랑, 빛은 잘못된 휴머니즘으로 흘러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뭐든지 진실하고, 청념결백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진리가 빠진 모든 행위는 옳지 않다고 보는것이 맞다.
예를 들어 성실하고 헌신적이며 진실적인 간호사가 치료제인줄 알고 환자에게 투여한 약물이 독약이었다면 어떠한가?


오늘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적그리스도는 멋있는 모습,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휴머니즘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는 것은 그 안에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진리가 빠져있는 모습은 매우 위험하다. 요즘 종교다원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어떤 종료극 작고 믿던, 진실하게만 믿으면 모두 구원을 받는 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역시 적그리스도의 영향력인 것이다. 유물론적인 사회 분위기는 사람은 각각 자기 생각이 옳은대로 살면 되는 것처럼, 사람 개개인이 진리인 것처럼 오인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존재하는 사람이 100명이라면 100가지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충되는 개개인의 가치판단이 진리로 통용될 수 있는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인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하는 포인트는, 나는 진리의 사람인가? 라는 질문이다. 진리는 상대주의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념과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진리이며 기준인지 모르는 사람은 한번 흔들리면 돌아갈 곳이 없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에 명품이 없는 이유를 아는가? 명품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의 잘나가는 신발가게가 있었음에도, 아이폰에 들어가는 각종 부품이 한국산이더라도 우리나라에 신발 명품 브랜드가 없고, 아이폰과 같은 브랜드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뛰느냐가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장인정신, 의식, 개념이 중요한 것이다. 신앙도 같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앎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 비록 지금은 내 삶이 신앙의 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살지라도 언젠가는 변화하게 된다.

(본론)
적그리스도인 마귀가 우리에게 주는 속임수의 큰 흐름은 2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적그리스도는 첫째, 우리를 개념없는 감상주의로 이끌어 가며, 둘째, 기다리지 못하는 완벽주의가 옳은 것으로 각인 시킨다.

(1) 개념없는 감상주의
감상주의는 감정에만 의존하여 흥분하는 것, 생각과 전력이 없는 것이다. 물론 감정도 중요하며 존재하여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생각과 전략이 동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느혜미야를 통해 신앙에 있어 감정과 전략이 철저하게 균형을 이룬 모습(느1,2장)을 관찰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는 말을 전해들었을때 느헤미야는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나 직접 그 현장답사를 나아갔을 때는 냉철함으로 감정을 누르고 아무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 하거나 공유하지 않았다.

우리가 선교시 주의해야 하는 점이 있다. 현장은 우리로 하여금 아픔을 느끼게 한다. 현장에는 임팩트가 큰 감동이 존재한다. 하지만 선교현장에서 헌금을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자세임을, 신교의 질서를 깨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느헤미야처럼 선교는 전략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감동이 있을 때만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도면을 가지고 신앙의 전략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불쌍해, 어떻해..라는 대책없는 울부짖음으로 끝내는 선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현장에서 돌아와서 기도하며 전략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전략적이었던 선교의 모습으로는 CCC의 민족복음화 운동에 앞장섰던 김중근 목사를 예로 들수 있다. 지금은 대한민국 어딜가도 교회를 볼 수 있다. 하지만 30년 전만해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민족복음화 운동 덕일 것이다. 김중근 목사의 선교전략은 시골,오지에서 학교 선생님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복음화 운동을 시작함으로서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된것이다. (잠24:6)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개념없이 감상저의에 빠지는 것, 전략없는 선교 이 모든 것이 마귀의 장난임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진리를 판가름해야 한다.


(2) 기다리지 못하는 완벽주의
완벽주의의 약점은 기다리지 못한다는 점이지만, 기다림의 미학에는 사랑의 싹틈이 있다. (예배소서4장1-4절)에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흠이 없어야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이것은 완전주의에서 나온 생각이며, 이런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는 것, 사랑으로 용납하고 오래참츰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겐 중요하다. 악한 마귀는 예수 믿는 공동체가 흠이 있어야 되겠느냐며 공격한다. 하지만 우리는 내 자신이 완벽하지 않고, 교회 역시 흠투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완벽만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적인 생각은 옳지 않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의 미학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시편40장 1절처럼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기다림은 신앙의 인격을 성장시킨다. 율법주의와 명분주의로 자기증명을 하기 위해 애쓰는 어리섞음에 빠지지 말고 자기 이익을 포기하여 믿음과 인격의 성장으로 흘러가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이제 내 결단을 가지고 스스로 서길 원하신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들 뒤에서 균형을 잡아주다가 아들도 모르게 손을 놓아주는 부모와 같이...하나님도 우리를 이런 모습을 원하시는 것이다.


(결론)
오늘도 진리와 개념을 갖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무엇이 진리인지 조차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살아가지 말자.
마치 내가 갖은 논리와 이성이 정답인 것처럼 장담할 수 없음을 깨달으며, 내가 오직 진리로만 보고 서는 성경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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